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난 코르테스 (문단 편집) === [[슬픔의 밤]]과 그 이후 === [[파일:external/mxcity.mx/mxcity.mx_hernan-cortes.jpg]]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의 소식이 테노치티틀란에 전해지자 몬테수마 2세는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이미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상태에서 틀라스칼텍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번에는 아예 동맹 도시인 촐룰라를 함락시켜버린 이 미지의 군대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느낄 만도 했다. 코르테스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말에 대한 공포심을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죽은 말의 시체를 묻어 철저히 은닉하기도 했다. 몬테수마 2세의 입장에서는 아즈텍의 군사력으로 이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황제는 결국 직접 나와 이들을 환영하기로 결심했다.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인 몬테수마 2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여기서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했다고 하지만 이게 와전된 것인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이다.][* 코르테스에게 제국의 심장부를 덜컥 내어준 몬테수마 2세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콩키스타도르들의 경계가 풀어지기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기습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수십만 명의 아즈텍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으므로 일단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살아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냈다. 이때 몬테수마 2세의 황녀와도 눈이 맞아 그녀를 애인으로 삼고 사귀었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되고 말았다.[*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 2세마저 오히려 아즈텍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거나 혹은 사망했다. 자세한 건 [[슬픔의 밤]] 참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1,000명의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들과 수천 명의 틀락스칼텍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하에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어버렸다.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속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세 번이나 겪게 되었지만('''[[슬픔의 밤]]''', 1520. 6. 30), 코르테스 본인에겐 천만다행으로, 그리고 아즈텍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때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었던 마르틴 로페스는 무사히 생존하여 훗날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때 핵심인물이 되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재물들의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보물을 적게 소지한 자들은 생존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러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를 위한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가 압수해버렸다. --어차피 몰수 당할 보물에 뭐하러 집착하다가 목숨을 잃었는지...--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km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스까지 이어졌다. 후퇴 과정도 고난이었는데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가, 아즈텍의 추격자들 및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부하들과 함께 질풍처럼 돌파했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한 적이 수차례나 있었다.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1520. 7. 7)도 그렇게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창을 잘 써서 투창이 정확했다. 한편 그렇게 도망치던 도중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들은,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여 의식을 다 때려 엎고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한 후,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었던 10,000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고 귀가시켰다. 당시 아즈텍의 인신공양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소나 말, 돼지 같은 고기를 다량 제공하는 대형가축의 부재로 인하여 그 탓에 아직까지도 인신공양의 풍습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 피의 의식을 금지하고,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령했다. 그 덕분인지 이후 [[인신공양]]은 사라지게 되었고, 제사의식은 가축을 도축하여 바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는 종교적인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건 코르테스가 다른 부족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https://arca.live/b/singbung/33802251?mode=best|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를 기준으로도 인신공양 행위는 경악할 대상이었다. 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을 하는 끔찍한 행위는 단지 중세 유럽인들에게 비교적 이례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 원주민은 이교도였기에 이러한 행동이 더욱 합리화되었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 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이다. 이 구조가 고도화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백인의 의무]]'''이다.][* 애초에 코르테스가 멕시코 땅에 간 이유 자체가 [[황금]]과 [[보석]]을 노략질하는 선에서 끝났지 살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에르난 코르테스도 살인을 밥먹듯 하는 [[아즈텍]]인들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숨 돌린 베라크루스에서 코르테스를 싫어하는 쿠바 도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마주하게 되어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이번엔 무장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하여 또 한번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이 '''셈포엘란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세력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지의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던 데 있었다.[*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니었고,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지는 판국이었는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만 해도 걸핏하면 귀족들이 말을 안 듣고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애초에 [[스페인|본토]]부터도 국왕의 사위라는 인간이 [[포르투갈|나도 국왕이다]] 이러고 앉아있었던 데다가 본토에서조차 나 잘났다 너 못났다 식으로 맨날 투닥투닥거리는 판국에 지구-화성급으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본토를 다스리는 왕이 뭐라 하면 그쪽 총독의 반응은 당연히 "어디서 개가 짖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티나게 병신짓 하고 다니면서 왕에게 개기다가는 [[곤살로 피사로]] 같은 꼴이 나서 목이 떨어질 수 있었다.(피사로는 [[반역|아예 본토에서 파견한 총독을 죽였다.]])]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고, 심지어 같은 스페인군끼리 전쟁도 벌여야 했다. 한편 코르테스가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실에 보내 오늘날까지 남겨진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텍은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잉카 황제('''[[사파 잉카]]''')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 [[곤살로 피사로]]가 한 짓이었지만, 결국 그 곤살로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이 프란시스코 피사로 본인이었으므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어쨌든 판필로 데나르바에스를 셈포엘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그 포로들을 자군으로 흡수한 코르테스는 전열을 재정비했다. 마침 그가 [[슬픔의 밤]]때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 이에 힘입어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 공세를 펼쳤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근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200년 동안이나 아즈텍에게 인간목장 취급을 당했던 원한으로 코르테스를 적극적으로 도운 부족은 틀락스칼텍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부족들도 200년의 원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 보장) 등으로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천연두는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아즈텍의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아즈텍 제국]]의 중심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아즈텍 수도를 공격했다('''테노치티틀란 공방전''').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올 경우 아즈텍군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거기서 포격을 가하니 아즈텍군의 피해가 엄청났다. 그래도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갔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아즈텍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총 인구 500만 명, 수도 20만 명[* 당시 [[유럽]]에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 명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프랑스)|파리]]가 있었다. 그밖에 [[제노바]]나 [[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명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았다. 본 시점에서 70여년 전쯤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가 전성기 때 50만 명을 넘겼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유럽 기준으로 보아도 테노치티틀란은 상당한 대도시였다.]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었다. 다만 전투가 끝나고 아즈텍이 완벽하게 멸망해버린 데는 코르테스의 의지보다는 동맹군의 원한이 더 컸다. 당시 아즈텍은 주변 부족을 공격하는 걸 거의 정육점에 고기 사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했기에, 수백년 동안 인육과 종교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어온 데 따른 원한이 승리의 순간, 폭발적으로 해방된 동맹 부족들은 아즈텍의 거의 모든 인간을 학살해버렸다. 물론 코르테스와 그 부하들은 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수십배가 넘는 동맹군의 폭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르테스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휘하의 스페인 병사는 906명(기병 86기, 석궁병과 화승총병 118명, 칼과 방패를 든 보병 700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동맹 원주민 군대는 '''총합 125,000명'''에 달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